Stardust 길벗

멜로디언, 나이키 운동화 그리고 마이마이

isanha 2020. 8. 31. 00:50

너무나 가지고 싶었으나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관하여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눈, 한때 제자이자 지금은 친구인 녀석이 글쓰기 모임 블로그에 충격적인! 글을 올렸다. 값비싼 최신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에 관심이 가서 계속 살펴보고, 살지 말지 고민하다 마침내 샀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월급의 1/10이 넘는 돈을 지불해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자신이 그 물건에 대한 소유를 소비하는 건지, 그 물건을 통한 욕망을 소비하는 건지 ‘무려’ 두 달 정도를 고민했다고 한다. 사실 이어폰을 산 일이 충격이 아니라, 이어폰을 사고 나서 자책감이 들었고, ‘무려’ 6개월이 지나서 여전히 마음 한편에 불편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지닌 채 그 사실을 고백했다는 점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거나 돈을 버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친구들과 인권운동 모임을 꾸리고 연극을 하고, 시민단체에서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하며 가치 지향적인 삶을 살던 녀석이라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랬던 녀석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제 자신도 돈을 벌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 고백을 들으며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철이 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왠지 녀석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녀석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다가 내 지난 시절 꼭 소유하고 싶었던 물건들에 관한 추억들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누가 쓴 글에 대한 댓글이 그 글보다 더 길어지는 것은 ‘상도’가 아니기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면 너도나도 부끄럽고, 부담스럽기에 이렇게 따로국밥이 아닌 ‘따로글’을 쓰려고 한다.

 

멜로디언

행정구역상 엄연히 도시 변두리이지만 사실상 시골인, 한 반이 곧 한 학년인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6학년 때 학교에 합주부가 생겼다. 요즘에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아이들이 바이올린도 배우고, 어떤 학교는 오케스트라 부까지 운영하지만, 그 당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일은 상당히 폼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 다들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 탬버린을 쳐보기도 하고, 리코더도 불어본 경험도 있겠지만 이 새롭게 생긴 합주부에는 ‘무려’ 건반악기인 멜로디언이 중심이었다. 합주부 첫 모임 때 악기를 정하는 데 큰 북과 작은 북 정도야 학교 악기로 연주하지만, 나머지 악기들은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사용해야 했다. 담당 선생님은 ‘멜로디언’이 합주부의 중심이라며 추천해주셨다. 중심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난 멜로디언을 연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였던가? 집이 경제적으로 한참 어려웠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엄마가 아침마다 도시락 대신 동네 구멍가게에서 외상으로 산 50원짜리 빵(땅콩샌드, 보름달 등)을 가방에 넣어주곤 하셨다. (그때는 마냥 좋았지만 지금 그때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오신 다음에 얼마간의 목돈도 생기고 ‘눈부시게’ 집안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무려’ 칼라TV를 살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업이 없으셨고(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직업 자체가 없으셨다!), 그나마 모아놓은 돈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부모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졸라본 적이 거의 없는 아이었다.(아! 맞다! 그 당시 새로 나온 과자 ‘포테이토 칩’ 광고를 보고 과자 부서지는 소리에 미혹되어, 너무 먹고 싶어서 울면서 졸랐던 일이 있기는 했구나!) 어쩌다가 뭐 사 먹으라고 엄마가 준 동전을 받아도 호주머니에 그대로 넣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생일날에 선물이나 용돈을 못 받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때 멜로디언 연주가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그래야만 폼이 난다고 생각했었는지 며칠에 걸쳐 거의 울부짖으며 엄마를 괴롭혔던 생각이 난다. 급기야 엄마는 멜로디언 가격을 알아보기까지 하셨지만, 아니 알아보시고 나신 후 그 가격에 놀라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줄 수 없다고!

 

그렇지만 합주부 가입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단짝 동네 친구와 함께, 음악 시간에 연주하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피리’(엄밀히 말하면 ‘리코더’라고 해야겠지만 그렇게 불러야만 그때의 느낌이 살아나고 이 글에 어울린다)를 들고 합주부 교실로 향했다. 앞쪽에 있던 다수의 멜로디언 연주자들의 ‘기품있고’, ‘웅장한’ 연주를 보고 들으며 뒤쪽 구석에서 연주자 숫자로나 소리로나 마이너일 수 밖에 없었던 나는 ‘멜로리어니스트’들이 마냥 부러웠고, ‘피리스트’인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멜로디언이 아니더라도 실포폰 정도는 연주했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면서. 그래도 위안이 되었던 건 내 옆에서 같이 피리를 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는 점, 내가 혼자 좋아하던 여자애도 피리스트였다는 점, 우리 학년의 피리스트 네 명 모두 전교 1, 2위를 다투는 (참고로 전교생은 60명!)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는 점, 막상 연습에 집중하면 나름 재미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실 피리스트 안에서도 등급이 있었다. 그 여자애는 블랙과 화이트 투톤에 울림통도 있고 분리도 되는, (아마도) 정품 엔젤 브랜드 리코더를 연주했고, 난 학교 앞 문방구 앞에서 산, 일자로 쭉 뻗은 일체형 노란형광색의 오백원짜리 피리를 연주했다. 그런데 어느 날 피리스트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일이 생겼다. 학교 역사상 처음 생긴 합주부에 관심이 많으셨던 교장 선생님께서 친히 왕림하셔서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합주부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내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든 충격적인 말을 무심코 엿듣고 말았다. “사실 교장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악기라고 피리를 꼭 넣어야 한다고 해서 넣기는 했는데 피리 소리는 합주부에 잘 안 어울려요.” 사실 우리가 불었던 건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정통 ‘피리’도 아니었거니와, 그동안 애써 부끄러움을 꼬깃꼬깃 접어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훌륭한 음악은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가 만드는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연습했었는데 이게 무슨 ‘억지 춘향이 울며 피리 부는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사람 마음은 비슷한지 내 단짝 친구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피리스트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자괴감이 컸고, 둘이서 이를 소재 삼아 자조 섞인 말들을 주고받으며 웃기도 했다. “야! 그래도 합주부 연주복 같은 게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고급스러운 연주복을 입고, 손에는 촌티 나는 피리 하나 들고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ㅋㅋㅋ” 뭐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농을 하던 우리가 시에서 하는 큰 행사에서 연주복을 입고, 공설운동장 트랙을 돌며 연주하던 다른 학교 합주부 행렬 가운데서 피리스트들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웃었던지! 아무튼, 그 후에도 나는 학교의 ‘공식’ 합주부원으로서 애국가도 연주하고, 졸업식 노래도 연주하며 학교 졸업식 행사 등에서 보려면 ‘보란 듯이’, 들으려면 들으란 듯이 합주부 구석에서 앞으로는 멜로디언 소리, 뒤로는 큰 북소리에 묻히고 치이며 ‘맹활약’(‘맹하게 활약’)을 펼쳤다.

 

 

나이키 운동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신박한 TV 광고를 영접했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로 끝나는 나이키 운동화 광고였다. 말표 고무신(세상에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니 2020년 현재 온라인에서 여전히 판매 중이다)이나 기차표 월드컵 운동화 정도가 유명브랜드였던 시절(이후 까발로, 카미트, 스펙스 등 온갖 브랜드들로 요란해지긴 했지만) 감각적인 로고 영상과 간결하면서도 세련되어 여운이 남는 ‘나이키’ 광고를 보고 반 아이들이 카피 문구를 장난삼아 따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개성과 창의성을 키운다며 교복 자율화 1세대가 되고 그야말로 브랜드 운동화 시장의 빅뱅이 이루어졌다. 나이키뿐만 아니라 아식스, 아디다스, 국내 브랜드임을 내세운 프로스펙스까지 운동화를 중심으로 한 고가의 스포츠 브랜드들이 화려하게 시내 중심가에 입점하기 시작했다. 시장 한쪽에 고무신부터 실내화, 구두까지 온갖 신발들을 모아놓고 총채로 먼지를 털어내던 구식 점포가 아니라 통유리에 고급스러운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고, 마네킹이 서 있던 모던한 매장이었다. 8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상징하듯 10대 청소년들은 너도나도 유명브랜드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비슷비슷한 형편의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와 달리 변두리 중소도시이긴 해도 나름 시내 중심부에 있던 중학교에서는 조금 더 다양하고 세련된 패션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남중, 여중, 남고, 여고가 한 재단에 속해 있고, 같은 교문을 통과해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등하교하던 곳이었기에, 타인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더 민감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이라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앞에 걸어가는 아이들의 운동화 상표가 눈에 띄었으니까.

 

당시 유명브랜드 열풍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학교 앞에서 노점을 하시던 분들이 주력하시던 상품 가운데 하나가 흰색 면티 소재로 된, 목에 두르고 그 위에 옷을 입으면 마치 안에 흰색 라운드 티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옷이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리 뭐라고 부를 수도 없는) 기괴한 패션아이템이었다. 그 아이템이 은근히 잘 팔렸는데 그 아이템 위에 나이키, 아디다스 등의 로고가 나름 화려한 색상으로 진짜 뺨칠 정도로 자연스럽게 프린팅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운동화뿐만 아니라 가방까지 유행했고, 운동화 살 형편이 안되는 아이들은 뭐 테니스를 치거나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완장을 두르듯 팔목에 유명브랜드 아대(팔목보호대)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 유명브랜드 열풍에 편승해서 영세중소업체에서 만든 누가 봐도 딱 ‘짝퉁’티가 나는 ‘나이스’, ‘아디도스’ ‘프로스포츠’ 등 유사상표가 범람하기도 했는데, 그 기발하면서도 습자지처럼 얇은 상술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열풍에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워낙에 패션에 관한 관심이 한 4 정도밖에 없는 아이이기도 했고, (당시 나는 사춘기임에도 거울을 거의 보지 않았다. 외모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왠지 부끄러운 일이고 스스로 깊이가 없는 속물임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이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패션테러리스트’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예정된 길을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반에서 유명브랜드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대부분 공부보다는 외모에 관심이 많은 이른바 ‘날라리’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정신승리?) 그러나 사람의 심리가 어찌 그리 단순하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측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있고 우습기도 한데 그 다양한 유명브랜드 운동화를 보면서 나는 열등감 내지는 계층의식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길거리나 버스 안에서 유명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왠지 나하고는 다른 세계에 속한 아이들 같기도 했고, 혹 마음이 가는 여학생을 봤는데 운동화가 나이키이거나 아디다스일 때면 더더욱 그렇게 느꼈다. 유명브랜드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이 내면보다 외모에 치중하는 아이들일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에 기반한 정신승리의 반대편에 나이스나 아디도스를 신은 아이들의 자존감 없고 품위 없는 모습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펙스 수준의 중저가브랜드 운동화를 신으며 그게 절묘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내 위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정환경 조사서 경제환경 부분 ‘하’에 아버지가 동그라미를 치면 그게 부끄러워서 몰래 X표를 하고 ‘중’에 동그라미를 친 일도 있었던 걸 생각하면 있어 보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없어 보이고 싶지도 않았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결코, 중산층이 아닌데 그래도 중산층이 되고 싶어 했던 허위의식?)

 

어느 날 이러한 나의 이중적인 의식을 폭로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서 싸움판이 벌어지고, 인간 내면의 악에 관해 생각하고 목격하던 중2 때였다. 당시 유명브랜드 운동화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는데 반에서 다른 사람들이 신던 유명브랜드 운동화를 학교로 가져와 파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중고 상품이 아니고, 빨아서 말리려고 널어놓은 남의 운동화를 훔쳐 와서 파는 ‘장물’이었다. 이게 또 은근히 호응이 좋았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런 운동화를 훔쳐 왔을지도 궁금하거니와 매번 바뀌는 브랜드와 디자인, 흥정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흥미로웠다. 그러던 중 재미 삼아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내 심경을 심하게 동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만약에 브랜드 신발을 산다면 저런 걸 사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바로 그 신발이 현실태로 책상 위에 올려진 것이다. 깔끔한 흰색에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섀미가죽으로 된 세련된 나이키 운동화였다. 운동화에서 분리할 수 있는 두터운 고급 깔창까지 제대로 있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게다가 장물이니만큼 평소 스펙스 사던 가격에 조금만 더 보태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눈 딱 감고 조금만 무리하면 드디어 나도 나이키 운동화 웨어러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경멸하기까지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번쯤 소유하기를 열망했던 나이키 운동화! 적어도 하루 동안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인간의 욕망과 의식이란 참으로 다양한 탈을 쓰고 있는, 모순 가득한 것이라는 걸. 결국 ‘바른생활 소년’이었던 소심한 내가 그 나이키 운동화를 사진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신고 벗고 상상했던 ‘내 나이키 운동화’에 대한 잔상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 영화 <묻지마 패밀리> 세 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한 편인 박광현 감독의 ‘내 나이키’를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나도 가지고 싶어서 장식용 미니 우산 만들기 아르바이트, 누나 저금통에서 동전 빼내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돈을 모았던 주인공 소년이 동네 양아치들에게 돈을 빼앗기는 장면은 너무 안타까웠지만,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운동화, 체육복 등 온갖 것에 나이키 로고를 새기고 행복해하던 장면에서 나도 덩달아 행복해했다.

 

마이마이

그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중학생들은 ‘마이마이’를 가지는 게 꿈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소니의 ‘워크맨’이 원조 격이고 ‘마이마이’는 삼성에서 만든 B급의 플레이어였지만 휴대용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칭해서 그냥 ‘마이마이’라고 불렀다. 그건 유명브랜드 신발과는 다른 차원의 세련됨이었다. 휴대용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는 단순한 음향기기를 넘어 ‘자유’와 ‘예술성’, ‘세련됨’의 상징이었다. 그냥 마음에 품어만 보았던 나이키 운동화와 달리 나는 어떻게 해서든 ‘마이마이’를 손에 넣으리라 결심했고,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다. 뻔한 가정형편을 고려할 정도로는 철이 들었기에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신문 배달을 하던 반 아이(이름도 기억나네. 라성민!)와 친하게 지내던 때라, 그 아이의 소개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했다.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거침이 없었다. 사실 신문 배달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남들이 자고 있을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곳곳을 누비며 신문을 배달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설렜다. 내 자전거도 생기고, 게다가 덤으로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생긴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중2 때 조간신문을 잠시 돌린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새벽마다 일어나 광범위한 지역에 100부가 넘는 신문을 돌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고, 내게 일을 가르쳐주던 신문사 총무형은 욕도 잘하고, 남의 집 우유도 마구 빼서 마시고, 무섭기까지도 해서 한 열흘 남짓 다니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다. 그때 도중에 그만둔 일이 마음에 내내 걸리기도 했고, 이번에는 석간신문이라서 새벽마다 일어나야 하는 부담감도 없었기에 재도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고입 시험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이었고,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중3 아이들을 수업 후 남겨서 자율 아닌 자율학습까지 시켰지만 나는 선생님께 당당히 이야기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공부 좀 하는 내가 어려운 형편의 반 아이와 함께 자율학습 대신 신문 배달을 하겠다는 사실에 살짝 당황하시는 듯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으시고 허락해주셨다.

 

설레임과 긴장감이 범벅된 마음으로 신문사에 간 첫날, 토요일 오후에 만난 신문사 부장님은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고 목소리도 중후한,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오후는, 바로 그분의 거침없는 욕설과 매타작으로 시작되었다. 지 마음대로 신문 몇 부를 빼돌려 팔아먹었다고, 몇 명의 아이들을 몽둥이로 후둘겨 팼다. 어찌나 인정사정이 없었던지 맞은 아이들은 두려움과 수치심, 고통으로 뒤범벅된듯한 눈물을 흘렸다. 중2 때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오래 못 버티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로. 그렇지만 예전에 신문 배달을 인수인계하던 총무형과는 달리 새로운 신문사의 총무형은 말투가 부드러웠고, 내 작은 실수도 웃음으로 넘겨주었다. 그렇게 무섭던 부장님도, 내 친구가 마뜩잖게 여겼던 경리 누나도 내게는 유독 다정했고 친절했다. 부장님은 내게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이것저것 묻기도 했고, 유머러스했으며 경리 누나는 때때로 특별히 간식까지도 챙겨주었다. 수줍음이 많고 여려 보이지만, 잔머리를 굴리거나 요령을 피우지 않아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럭저럭 나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에 잘 적응해갔다. 그리고 무심하고 팍팍한 세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 나름의 현실의식을 깨우쳐갔다. 신문을 구독하는 집에서 더 이상 신문을 구독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이야기 해도, 절대로 내 임의대로 신문을 넣지 않는 일은 없어야 했다. 개가 짖든, 주인이 소리를 치든 상관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신문사 부장님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기를 쓰고 그 집이나 사무실에 신문을 넣어야 했다. 신문 구독 중지는 내 권한이 아니라 신문사 부장의 권한이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1년이나 2년 넘게 신문 구독료를 내지 않고 버티고 있는 장기구독료 연체자의 경우에 구독자가 아무리 윽박지르거나 회유해도 밀린 구독료를 받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했다. 자신이 맡은 구역의 구독자가 줄어들지 않게 잘 관리하는 게 중요했고, 구독자를 늘리는 일을 ‘확장’이라고 했는데 확장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확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배달하던 신문은 ‘경향신문’이었는데 (지금은 진보적인 매체이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 통장님, 반장님들에 무료로 넣어주던 친여권 성향의 비주류 신문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려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훨씬 선호했다. 돈 내고 경향신문을 보는 사람들 자체가 우리 배달 소년들 스스로 잘 이해가 안 될 정도의 분위기였다. 배달에만 전념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구독자 수를 유지하거나 확장해야 했고, 시기에 맞게 최대한 신문 대금을 ‘수금’하는 일이 중요했다. 신문 배달을 끝냈다 하더라도 수금한 액수가 너무 적으면 퇴근을 하지 못하고, 다시 수금하러 방대한 지역을 누벼야 했다. 이미 받을 수 있는 집은 다 받았는데, 오늘은 더는 받을만한 집도 없는데 다시 수금하러 나가야 하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밀린 신문 대금도 내지 않고 이사를 가버린 집도 있었고, 새롭게 구독을 시작한 집인데 몇 달간 공짜로 신문을 보고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고층 아파트를 오르락 내르락 하며 배달을 하기도 했고, 여자 중학교에 신문을 넣을 때는 혹시나 아는 애라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문 대금을 제 때에 주는 집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간혹 맘씨 좋은 분들은 내게 간식을 주기도 했고, 그 가운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은 “너 정말 잘 생겼다!’라며 말씀하시고는 한참을 쳐다봐서 부담스러워 했던 기억도 난다. 신문 한 부를 확장하면 그달 월급에서 천 원씩을 더 받았는데 그게 또 꿀맛이었다. 확장을 한 부라도 한 날이면 신문사 지국 2층 계단을 오를 때 힘이 나고 자신감이 넘쳤다. 부장에게 역량을 인정받는 아이들도 있었고, 늘 구박받고 욕받이가 되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나는 영업 면에서 큰 존재감은 없었지만, 사고를 쳐서 크게 욕먹지는 않을 정도로 구역을 제법 성실하게 관리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 배달 소년’으로 인정받았다. 한 달 내내 배달하고, 수금하고, 어떨 때는 주말에도 수금하러 다닌 끝에 2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았을 때의 감격은 제법 큰 것이었다. 나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번 나름 거금이었으니까. 그때 당시 마음먹으면 나이키 운동화도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으니까. 월급을 탄 날이면 우리 배달 소년들은 호기롭게 간식을 사 먹거나 전자오락실에서 오락을 하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난 될 수 있으면 그 돈마저도 아끼려고 했다. 마이마이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아야 했으니까.

 

그때 내가 했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가 있다면 받은 월급을 엄마에게 드렸다는 점이다. 엄마가 은행이 아닌데, 게다가 아버지는 고정된 직업이나 수입이 없었고, 우리 집은 늘 돈이 궁했는데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에게 맡긴 세뱃돈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에게 맡겨지고 자라날 거라고 믿었던 내 월급들은 그때그때 집에서 필요한 곳에 쓰였던 것 같다. 물론 엄마의 주장은 다르다. 결국, 그 돈들은 다 내게 필요한 일들에 썼을 뿐이라고 별로 미안한 내색도 없이 말씀하셨다.(고 나는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6개월 정도 신문 배달을 했고, 그 돈을 그대로 다 모았다면 꽤 괜찮은 ‘마이마이’를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 배달을 하며 우리 집의 경제 형편뿐만 아니라 세상의 팍팍함과 돈벌이의 무서움도 경험하고 알게 되었기에 크게 억울해하거나 엄마를 많이 원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비 오던 날의 기억

군대까지 다녀오고 대학에 복학해 군대 시절보다 더 빡세게 공부하며 지냈던 어느 비 오던 날 저녁이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우리 집 형편은 쭈욱~ 일관성이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시다가 부도가 나 쫄딱 망하신 아버지가 갑자기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머님의 평생소원은 적어도 좋으니 고정된 수입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버신 얼마간의 목돈과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간간이 버신 돈, 아버지께서 개간한 밭에서 수확한 고들빼기 등의 농산물을 새벽 시장에 팔아서 번 돈 등이 우리 집의 허약한 재원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대학 등록금은 최대한 장학금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고(온전한 해결을 이룬 적은 거의 없었고 부분적인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지만) 용돈은 부모님께 따로 받지 않고 과외 등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던 때였다. 그런데 새롭게 구해서 과외를 하던 집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몇 달째 과외비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과외비를 받는 날마다 어머님은 자리를 피하셨고, 다음 달에 한꺼번에 주시기로 약속했지만, 번번이 미루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당장에 쓸 용돈도 바닥이 나서 궁핍해진 상황이었다. 궁핍해지니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꺼려지고, 슬슬 초조해졌다. 예전에 과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배가 고파서 붕어빵을 사 먹었을 때 만약에 붕어빵 사 먹을 돈이 없었으면 꽤 속상하고 슬펐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상황이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비 오던 그날에, 비록 한 달 과외비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과외비 일부를 받은 것이다. 그마저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시내에서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듣고 싶었던 음반 하나, 부모님과 함께 먹을 양념치킨 한 마리를 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는 사람이 많아 내내 서서와야 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웠다. 현실적인 물질적 풍요(?)에서 비롯된 마음의 풍요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게 되면 이 정도의 물질적 여유는 누리고 싶다는 생각. 읽고 싶은 책을 사볼 수 있고, 듣고 싶은 음반을 사서 들을 수 있고, 가끔이라도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의 장면과 그날의 생각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고 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다.

 

그리 풍요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면서 때로 무엇인가 소유하고 향유하기를 바랐던 나였고, 번번이 그 바람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 결핍과 좌절들이 나를 다른 경험으로 이끌었고, 성숙시켰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 들어가 나보다 2~3배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친구들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고, 다른 선생님들이 교사 월급이 적다고 말할 때도 나는 늘 내가 하는 일에 비해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에 외바퀴 수레에 고들빼기를 잔뜩 싣고 끄시던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고, 지역사회 야학에서 만났던,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학생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큰 결핍을 지니지 않고 사는 내 모습에 여전히 문득문득 놀라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결핍된 것은 어쩌면 ‘결핍’ 자체인지도 모른다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겪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물론 그 결핍은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내지 않을 정도의 감내할 만한 결핍이어야 할 것이고,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늘 멋진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들이 지닌 함의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연습하고 있는 오카리나 연주의 기본 호흡과 리듬감은 초등학교 합주부 피리스트!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마이마이’가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던 그때 ‘마이마이’는 얻지 못했지만, 마이마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하지 못했을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어쩌면 그 경험들이 지금 내 인생의 모습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문 배달을 할 때 내게 구역을 넘겨주었던 (명문대 휴학생이라던) 총무형은 영어자습서 뒤에 간략히 정리되어있던 문법 내용을 보던 내게 조언했다. 영어공부를 체계적으로 제대로 하려면 초록색 표지의 <성문기초 영문법>을 사서 봐야 한다고. 막상 그때 사놓고 보지 않았던 그 책을 나는 지역 명문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체계 없이 했던 영어공부가 바닥을 보이고, 그로 인해 충격적인 점수를 받고 나서야 펼쳐보았다. 영어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성문종합영어>를 보고 있던 고1 여름 방학 때 나는 중학교 때 마스터했어야 할 <성문 기초영문법>을 뒤늦게 공부했다.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에 감동했다. 영어문장의 구조와 체계가 주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 뒤로 시중에 있는 거의 모든 영어참고서를 섭렵했다. <성문종합영어>를 세 번이나 꼼꼼하게 반복해서 공부하며 장문 독해 편에 실린 서머셋 모옴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글에서 감동을 받고, 멋진 문장들을 외웠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의 내 인생계획과 다르게 국어 선생님이 아닌 영어 선생님이 되었고, 그 사실에 한때는 회한도 느끼고 안타까워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킨들로 각종 영어원서들을 읽으며 매력적인 문장과 이야기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이러려고 영문과를 나왔나?’ 감탄하기도 한다. 인생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때 만약 내가 ‘마이마이’를 사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신문 배달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총무형을 만나지 못했고, <성문 기초영문법>이란 책을 소개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 반 아이 하나가 자신의 고민을 모둠 일기장에 진솔하게 적은 적이 있다. 최신형 핸드폰을 너무나 갖고 싶은데, 자신의 집 가정형편을 고려하면 핸드폰은 소유 자체가 사치라고 할 정도로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엄마가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시며 힘겹게 자신을 뒷바라지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이 철없이 떼를 쓰고 있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핸드폰을 못 사준다는 엄마가 너무나 야속하고, 그걸 야속하게 생각하는 자신도 못 마땅해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답글을 달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 ‘마이마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답글을 적었다. 그렇게 꼭 사고 싶으면 사라고. 괜찮다고. 그러나 핸드폰값은 네가 직접 벌어야 한다고. 엄마가 새벽에 시장 나가실 때 같이 따라 나가고, 밤에 포장마차 정리하실 때 같이 정리하라고. 그렇게 일한 만큼 돈을 벌어서 사면 된다고. ‘핸드폰’ 소유에 대한 열망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쉽게 얻는 대신 뭔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얻기를 바란다고. 어쩌면 핸드폰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될 수도 있다고.

 

몇 년 전에야 드디어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이키’ 운동화를 샀다. 열망은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들었고, 어느새 나는 큰맘 먹지 않아도 ‘나이키 운동화’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크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사춘기 시절 이루지 못했던 소박한 열망을 추억하고 싶었고, 뒤늦게나마 이루고 싶었기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그 수 많은 신발 가운데 가장 할인율이 높은 최저가 나이키를 선택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내가 고른 나이키 운동화는 내가 중학교 때 장물로라도 사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운동화와 가장 닮은 운동화였다. 원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때? 막상 신어보니 별거 없지?” 그런데 막상 신어보니 감격스럽더라. 경험은 그런 것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