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을> 그리고 진영이
“서새니도 냉가 시치?”
페친 한 분이 권정생 선생님의 글이 밑바탕이 되고, 김재홍님이 그린 그림책 <그해 가을>에 관한 글을 올렸다. 그림책을 구해 찬찬히 읽었다. 시골동네 예배당 문간방에 살며 글을 쓰신 권정생 선생님에게 찾아오던 동네 아이 창섭이에 관한 이야기다. 창섭이에게는 지체 장애와 지적 장애가 있었다. 어느 부슬비 내리는 날 찾아와 한참을 기다리던 창섭이가 선생님이 계속해서 글을 쓰자 묻는다.
“서새니도 냉가 시치?”
순간 고개를 들고 선생님은 창섭이를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머 머구지따”라는 창섭이의 말에 선생님은 눈시울이 더워지신다. 찐감자 몇 개마저 없어서 둘은 방바닥에 누워 배고픔을 참고 찬송을 부르다 잠이든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온 어느 날 창섭이가 선생님께 다가와서 “서새니, 배 아뿌다.”라고 말한다. 선생님은 조금 놀랐지만 옷을 꼭꼭 여미지 않아 바람이 들어가서 그런거라고 냉정하게 말하며 옷을 여며주고 떼밀어 쫓아버렸다. ‘그의 부모, 형제, 친척, 골목길 아이들, 동네 어른들, 교회의 집사, 장로, 교회 학교 선생님이 그랬듯이.’ 다음날 창섭이가 죽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새니도 냉가 시치?” 선생님의 귓가를 떠나지 않는 창섭이의 한 마디.
글을 읽으며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우리집 뒤편에 있는 작은 언덕 너머에 살던 진영이라는 아이다. 나는 중3 무렵부터 대학교 1학년 초반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바싹 말리기 위해 단칸방을 반 넘게 차지할 정도로 펼쳐놓았던 붉은 고추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서 새벽기도에 가기도 했고, 밤 10시까지 진행되었던 학교 야자를 마치고 텅 비어 있는 교회에서 혼자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같이 손잡고 동네 산책을 하기도 하고, 내 등에 업어서 냇가를 건너주기도 했던 이웃 동네 꼬마 오누이를 위해 기도했고,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그 아이들의 엄마를 위해 기도했다. 도시 변두리에 있는 작은 교회였다. 장로님은 기차 건널목에서 차단기를 내리시던 분이셨고,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자는 스스로 가난하게 살며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해야 된다고 믿는 분이셨다. 농사짓느라 그을리고, 주름이 깊게 패인 할아버지 집사님의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기도에는 영혼을 두드리는 울림이 있었다. 희생과 사랑, 구원이라는 말들이 내 삶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끌어주리라 믿던 시절이었다.
교회에서
진영이는 바로 그 교회에서 만난 아이였다. 발음이 불분명할 때도 있고 살짝 어눌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아이였다. 간질로 인해 종종 여기저기에서 넘어져서 거품을 물며 심하게 발작을 했고, 그 때문에 얼굴을 비롯한 몸 곳곳이 긁히고, 파이고, 딱지가 붙어서 상흔이 가득한 아이였다. 가정형편 때문인지, 몸이 안 좋아서인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를 잠깐 다니다가 그만두었고, 동네에서 어울려 노는 친구도 딱히 없었다. 외로워서 그랬을까? 심심해서였을까? 언젠가부터 진영이는 교회 앞에 있는 군부대에서 초소를 지키던 군인들에게 말을 걸며 친분을 쌓았고, 그 가운데 특히 친해진 군인들과 함께 교회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분들은 진영이를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신앙심이 깊고 온화하신 집사님 한 분은 진영이의 병을 고치시겠다며 진영이를 붙잡고 기도하셨다. 학생회 아이들도 진영이를 환영해주었다. 그러나 진영이는 종종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고 피한다고 소리 내어 이야기했고, 다른 아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자기를 흉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어른들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학생회 아이들 몇몇은 진영이를 실제로 피곤해하고 힘들어했다. 관계 맺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관계를 악화시켜가는 진영이의 모습이 나는 안쓰러웠다.
진영이는 나를 ‘형’이라 부르며 잘 따르는 편이었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동무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울 때 진영이가 짓는 웃음에는 꾸밈이 없었고,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환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진영이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는 꿈, 자신을 멀리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했다. 진영이 안에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있구나,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묻고, 매달리고, 힘들어하는구나. 솔직히 나도 때로 진영이가 버겁게 여겨지고 부담스러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풀 수는 있는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진영이는 교회에 꾸준히 나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어서였을까? 철야 예배 후의 어느 날, 진영이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집사님의 표정이 굳어지셨다. “내가 마귀한테 속았어. 내쫓은 줄 알았더니 날 속인 거였어.”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하시던 집사님의 단호한 말이 내게 낯선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귀라니... 마귀라니...
야학에서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조금씩 교회와 멀어져갔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고, 운동하는 과 친구에게 ‘헤르만 헤세류의 책이나 읽는’ 비겁하고 나약한 대학생 취급을 받았다. 화염병은 아예 던져볼 생각도 못 했고, 어설프게 몇 번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도망 다닌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전태일의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고, 광주 민주화 항쟁에 관한 책을 읽으며 분노했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으며 홀로 ‘의식화’를 진행했고,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관련 책들을 읽으며 ‘구원’에 관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구로동 달동네 좁은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눈물 흘렸고, 공부방이 문을 닫으면서 좌절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지역에 있는 야학에서 교사로 생활했다.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생 또래의 아이들과 초등학교·중학교 과정을 밟지 못하신 아저씨, 아주머니들까지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새마을 금고 2층에 판자로 칸막이를 하고 교실을 만들어서 수업을 진행하는 작은 검정고시 야학이었다. 그곳에서 수업하고, 노래하고, 세미나를 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고, 아프지만 깊은 깨달음을 전해준 경험을 했다.
1년 남짓 야학 생활을 하고 군대에 가기 전이었는데 낯익은 학생이 새로 들어왔다. 진영이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청년회장을 맡았고, 이제 신학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신 분이 수소문 끝에 야학을 찾아온 것이다. 일반 학교는 다니지는 못하더라도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진영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진영이를 보고 반갑기도 했지만, 야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대에 갔고, 가끔 외박이나 휴가 때 야학에 들러 진영이를 만나기도 하고, 진영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공부에 관해선 수업을 따라오는 데 큰 무리가 없는데 인간관계 면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여학생 누나와 대학생 여교사들을 붙임성 있게 대하며 친하게 지내는 또래 남자아이에 대한 질투가 강해서 종종 갈등을 일으켰고, 사람들이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피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이어졌고, 심지어 타고난 선한 품성으로 인해 별명이 ‘천사’였던 내 친구를 칼로 위협하는 일마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야학 교사들과 학생들은 애정과 인내를 가지고 진영이를 품어줬다. 길가에서 진영이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발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약을 발라주었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밥을 먹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해주었다. 그렇게 진영이는 야학의 한 구성원이 되어갔다.
광화문 지하철역에서
세월이 흘러서 나는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야학 후배가 운영하는 제과점에 들렸다가 오랜만에 진영이를 만났다. 그런데 이때 만난 진영이는 이전의 진영이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이만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생각도 말도 어른스러웠다. 예전에 보이던 질투와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자신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친형에 대해 ‘자신도 어려우면서 저를 도와줘서 많이 미안하고 감사하지요.”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그 변화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여전히 상흔이 많아서 모자를 썼고, 이 몇 개는 부러져 있어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말하는 중간중간 피식피식 예전의 꾸밈없던 웃음을 보여줬다. 그동안 어떤 만남과 경험들이 이렇게 진영이를 성숙하게 변모시킨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진영이가 어떻게 독립된 성인으로서 살아가게 될지 염려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 이후로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16년 12월의 마지막 날, 늦은 밤 가족들과 함께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여한 후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광화문 지하철역 한쪽 구석에 장애인 등급제 폐지에 관한 단체 성명서가 있었고, 그 옆에는 몇몇 장애인분들의 사진과 사연들이 있었다. 사진을 둘러보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진영이었다. 장애인 등급제 폐지를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박진영 열사’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진영이... 진영이... 였다. 결혼하고, 거처를 옮기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잊고 지냈던, 우리 집 뒤편 언덕 너머에 살던 진영이였다. 큰 충격을 받고, 믿어지지도 않아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장애등급 재판정에서 등급외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격 박탈 위기에 놓이자 동주민센터를 찾아가 유서를 내밀며 3부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한 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며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들이 있었다.
박 씨가 남긴 유서에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 주저앉아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기록을 제대로 안 했다.', '서류만 보고 장애등급 판정하는 잘못된 관행 바로잡아 달라',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 씨의 둘째 형은 “동생은 심성이 여린 아이로 가족에게 장애등급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라며 “죽음으로 현 제도의 문제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나 보다”고 오열했다.
진영이가 세상을 떠난 지 3년도 넘은 후에야, 그것도 우연히 진영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몇몇 야학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그 친구들도 진영이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슬픔도, 미안함도, 허망함도 모두 늦어버렸다. 외로운 게 싫어서, 소외당하는 게 두려워서 사람들이 피곤해할 정도로 끝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말 걸었던 아이가 결국 외롭게 죽었다. 관계 맺기에 미숙했지만, 그 무엇보다 관계 맺기를 갈망했던 아이, 시간이 흐르고 성숙한 어른이 되었지만 독립된 어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원마저 끊기고,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잃을까 두려워 모든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진영이. “서새니도 냉가 시치?”라고 말하는 창섭이의 말을 듣고 나는 바로 그 진영이를 떠올렸다. 이미 애도마저 너무 늦어버렸지만, 이 역시 진영이의 삶에 대한 나의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겠지만, 신문 기사에 나오지 않는 진영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여전히 진영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진영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