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언니에게
선영이 언니에게
언니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매번 ‘물방울, 방울이 언니’라고만 불러 왔잖아.
오늘은 그냥 이름을 불러보고 싶네. 선영이 언니~
겁을 잔뜩 주었던 태풍 예보에 어제는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 했어. 우리가 집을 짓고 처음 맞는 제대로 된 태풍일 거라니 무섭더라구.
애써 뿌리 내린 나무가 흔들리진 않을지, 폭염도 이겨낸 화분이 데굴데굴 구르진 않을지.. 창문이 조금이라도 덜 흔들리라고 틈에 종이 박스를 구겨 넣으며 소심한 대비를 했지.
몇 번을 깨다 잠들다 아침에 눈을 뜨니 폭우며 강풍은커녕 선선한 바람에 딱 가을 날씨인거야. 정말 오랜만에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잡초를 뽑았어. 손톱 밑이 까매지게 맨손으로 풀을 뽑는데 마음이 편안해져. 언니도 알지? 잡초 뽑기 시작하면 곧 무아지경에 이르는 거.
풀 뽑다 말고 언니는 오늘 어쩌고 있으려나 싶어 언니네 집 앞으로 가 봤는데 현관문이 잠겨 있더라. 일어나 집에 있으면 열려 있을텐데.. 아직 자나, 나갔나.. 궁금했지만 벨을 눌러보진 못했어. 역시 병원에 간 거였더군.
그제 저녁 달걀 빌리러 온 언니가 아버지 얘기 할 때, 담담히 얘기 했지만 수심 깊은 눈 때문에 마음이 싸 하더라. 10년은 더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심각한 상태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는 언니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뭐라 말 건네기가 어려워서 아이들 마실 보내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어.
그 와중에도 언니는 우리 지우 덧난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고 갔지. ‘아고, 아프겠다. 좀만 참아, 조금 아플 거야’ 호호 불어주며 지우보다 더 아파 보이는 얼굴로 정성스레 상처를 살피는 언니.
그런 언니의 아버지가 아프시다니.
태풍이 들이닥쳐 비바람이 칠 때는 서로 부둥켜 안고 천둥 소 리에 같이 비명도 지를 수 있지만, 곧 닥칠 태풍을 기다릴 때가 가장 두려운 시간일 거야. 지금 그 두려운 시간을 견디고 있을 언니에게 우리 아빠 얘기를 해도 될까?
언니 아버지를 뵈면 돌아가신 우리 아빠 생각이 참 많이 났어. 두 분이 비슷한 연배에 닮기도 하셨거든. 울 아빠가 살아 계셨음 두 분은 분명 절친이 되셨을 거야.
술 좋아하는 딸들보다 더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들이시니까.
난 항상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고 따랐던 딸이었어.
딸은 나이가 들면 다들 엄마 편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아빠를 이기지 못하실 거야. 부재의 추억과 실재의 현실 사이에선 현실이 필패이니.
술 좋아 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아빤 ‘사람 좋은’, ‘호구’로 불리셨어. 한번은 엄마가 말다툼 끝에 ‘얼마나 사람이 우습게 보였으면 술값이 없다고 집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 술값을 치르게 하느냐’고 타박을 했지. 친구들이 아빠도 없이 마신 술자리에서 술값이 모자란데 주인이 외상을 주지 않으니 아빠에게 급 호출을 했던 모양이야. 신용카드도 없고(종이봉투에 현금으로 월급을 가져오던 때이니) 주인이 봐 주지 않으면 무전취식이 되는 상황이지. 아빠는 자다말고 옷을 꿰입고 술집에 가서 값을 치러주고 오셨어. 우리 집은 서울 와서 폭삭 망하고 잘 살아본 적이 없어. 아빠 친구들이라고 사정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런 아빠에게 술값을 부탁했으니 염치가 없기도 해. 엄마는 이런 아빠를 ‘호구’로 정의하셨고, 아빠의 친구들은 ‘사람 좋은’으로 수식하셨어. 근데 난 가족인데도 엄마 입장이 아닌, 아빠의 친구들 입장에 서게 되는 거야. 그 밤에 생각나는 친구. 집에는 전화를 못하지만 내 전화 한 통이면 자다가 나와 줄 친구. 그런 사람인 게 나쁘지 않아 보였어.
언니가 매주 대표로 택배를 받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챙겨 줬던 달걀 배달을 대신 하겠다 하고 처음으로 나눠 주려는데 개수가 안 맞아 보여. 이상해서 언니에게 확인 하니 언니 네는 요새 달걀을 안 받고 있다고.. 아니 그럼 정작 자기는 필요도 없으면서 이 귀찮은 일을 계속 하고 있었던 거야? 하니 ‘그냥 하던 거라..’하고 마는 선영 언니. 셈 빠른 사람들은 그런 언니를 실속 없다 하겠지만 난 그런 언니가 좋아. 그렇게 생색도 없이 궂은 일을 해 주었으면서도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에게 넘기면서도 ‘고맙다’고 하는 언니가 참 좋더라.
호구 아빠도, 실속 없는 언니도 좋아.
두 해 전이었나. 시골에서 언니 아버지가 석화를 잔뜩 사 오셔서 마을 사람들 다 먹으러 오라고 부르셨지. 가족들 모인 자리에 끼기도 어색해서 쭈볏대며 구워주신 석화를 몇 점 얻어먹고 오려는데, 나중에 그걸 일일이 까서 먹어보라 내어 주실 땐 괜히 부담스럽기까지 했어. 근데 그 뒷맛이 또 그렇게 달콤하데.
왕년에 어느 자리 있었다. 무슨 일 했다. 내세울 수 있는 사람들은 경우도 바르고 셈도 정확해서 뭘 불편하게 하지 않아. 또 대게 풍족한 생활에서 다져진 교양이며 학식이며, 품위도 넘쳐서 절대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난 조금 어렵더라. 그런데 언니의 아버지랑 새벽까지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술잔 채워 드리며 보냈던 밤은 참 편안했어. 사위도 딸내미도 잠들었는데 딸내미 동네 친구랑 새벽까지 어울리시는 아버지랑 보냈던 시간 말이야. 그 때 울 아빠도 이런 동네 친구 있으면 매일 저러셨을 거야. 싶은 거야. 그날 밤 난 집에 돌아 와서 조금 울었던 것 같아.
사춘기 딸의 여드름 약을 챙겨 주던 우리 아빠는 내가 사춘기를 지나고 얼마 안 되어서 극한의 두려움을 견디는 투병생활에 들어가셨어. 긴 간병 끝에 엄마도 아빠와 나란히 병실 한 곳을 차지하는 신세가 되어 나는 얼결에 간병인, 가장 노릇을 해야 했지.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한번에 벌어지는 상황이라 크게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 사실 당시의 고통스런 기억은 내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차단하고 살지만 가끔 뜬금없이 훅훅 떠오를라 치면 의도적으로 떨쳐버리려고 해. 나도 살아야 하니까.
어쩌면 멋모르던 어린 시절 나보다 지금 언니가 느낄 막막함과 두려움이 더 클 거야. 언니에게 다가올 태풍이 끔찍했던 더위를 끌어안고 물러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
봄에 사 놓고 고사 직전까지 갔던 몬스테라 화분을 이제야 분갈이 해 주었어. 어찌나 방치해 두었던지 뿌리가 엉켜서 애를 먹었어. 언니가 지우의 상처를 살피듯 뿌리 다치지 않게 정성스럽게 옮겨 심었다우. 저 초록이가 튼튼히 뿌리 내리고 본 잎이 몇 장 더 나거든 언니에게 선물해 주려고 해.
저 화분 가져가는 날 술 한 잔 줘. 술꾼의 딸들 답게 한 잔 더가 계속 반복되겠지.
언니랑 술 마실 생각하니 저 문장이 떠오른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 신경림
피식피식 웃으며 시시덕거리며 잠좀 자자 구박하며 새벽까지 쓰잘데기 없이 그렇게 놀자.
2018.08.25. 잎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