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소한 사정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 이 야릇한 말은 최근에 전영주 시인이 발간한 책의 제목이다. 벌써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끝없이 노력해도 표 나지 않는 일에 자신을 묻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묻혀버린 자기를 밖으로 끌어내야겠다고 마음먹게 될 주부들에게 글쓰기의 기초를 지도하고 전문 작가로 입문하는 길을 안내하는 책이다. 당연히 읽기 쉽고 활용하기 쉽게 쓴 글이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이 그냥 넘겨짚어도 좋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 펜을 잡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치게 될 문제를 미리 제시하고 거기에 즉답하는 형식으로 짜인 이 책의 이런저런 장을 읽다보면, 오랫동안 글을 써왔고 그와 관계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초보자라고는 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새삼스럽게 묻게 된다.
저자는 당신이 잘 아는 것, 사소한 것, 당신의 실패와 변화에 대해 쓰라고 말한다. 사소한 것과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일상에 묻혀 살아온 사람이 거창한 지식을 갖기는 어렵다. 까다롭고 복잡한 이론체계에 친숙해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하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주부가 여성주의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 친정이 어떻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별하여 키웠는지는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인간의 심성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공부한 적은 없지만 사흘 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남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어느 시간에 어느 시장에 나가야 좋은 배추를 값싸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친구와 함께 공부한다고 나간 아들이 어디서 무슨 그는 잘 알고 있다. 어느 방향에서 사진을 찍어야 자기 얼굴이 가장 예쁘게 나오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입술이 부르텄을 때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 자신이 무슨 약을 발라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다 사소한 것들이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소작농이 수확의 7할을 지대로 내놓아야 했던 것도 당신의 사정이고, 없던 도로가 뚫려 한 마을이 두 마을로 나뉘어 살아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며, 그 끔찍했던 입시 공부를 자식에게 강요해야 하는 것도 당신의 사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알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의 쓰고 있는 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실은 비단 글쓰기에만 한정된 진실이 아닐 것 같다. 어디에 좋은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를 당신의 사소한 사정에 비추어 마련하고 바꾸어가는 문화일 것이다. 문제는 결국 유연성인데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무협영화 한 편만을 보더라도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174~1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