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의 뭇잎

감정에 대하여 (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1. 30. 00:49

내 컴퓨터 어딘가에는 그날 통화를 위해 만들었던 메모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해야 되는 이야기와 해서는 안될 이야기, 그리고 처음 전화 받았을 때 인삿말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더 상세한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그 메모를 한번 리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때의 상황을 불러일으키는 일체의 일이 썩 내키지 않는다. 마치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자꾸 떠오르는 시시한 멜로디처럼 원치 않는 감정에 휩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하튼 난 심지어는 전화를 할 최적의 시간대까지 지인과 상의했다. 저녁밥 먹은 후가 그나마 나을 것이고, 배달업을 감안하면 밤 시간대가 나을 것이라는 둥 그런 통제할 수 없는 별것 아닌 상황까지 감안해가면서 오후 8시경에 전화를 걸었다. 녹취를 위해 녹음기를 틀고 스피커폰을 켰다. 심리적인 지지를 받고 싶어 부른 친구 한 명도 옆에 있었다. 통화음이 여러번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끝끝내 전화연결이 되지 않길 바랬다. “아 이분이랑 통화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통화가 잘 안돼서요..”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음에도 난 아무리 노력해도 전화가 안되길 바랬다. 하지만 “여보세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의 대화는 마치 면접장소에서 긴장한 면접자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매뉴얼대로 하려고 하다 보니 나름 나누어둔 모든 경우의 수에 맞지 않는 응답이 나온다던가 정작 매뉴얼대로 하려고 보니 영 아니다 싶어 다른 말을 했던 생각은 얼핏 난다. 이 모든 대화 역시 녹취를 해두었으니 다시 들어보려면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꺼려지긴 마찬가지. 녹취를 위해 날 걱정해준 친구가 옆에서 내용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첫 만남의 약속을 잡았다. 


첫 약속 시간 두 시간 전에 길을 나섰다. 또 다른 지인이 기꺼이 함께 해줬다. 길을 가던 중간에 갓길에 주차하고 이런 저런 사항들을 다시 체크했다. 지인을 태우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도 시간이 30분 이상 남아 있었다. 초조하게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그 오토바이를 타고 뒷자리에 어떤 여성 분을 태우고 그날의 그 오토바이 아저씨가 도착했다. 동행하신 여성분은 그 오토바이 아저씨의 아내 되는 분이셨고,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그 아저씨의 다리가 바퀴에 눌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짝 부은 그 분의 발등을 보았다. 합의금을 합의하고 며칠 뒤 다시 약속을 잡고 합의금을 드리고 경찰에 합의서를 주고 사건은 모두 종결되었다. 합의서는 내가 한 부, 그분이 한 부 가지고 있는 것이 원칙이나, 어차피 피해자 본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건이 종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합의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아마도 경찰쪽에 필요할 것이니 내가 한 부, 그리고 이 합의서는 경찰에 주라고 했던 것 같다. 일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러나 난 그 뒤로도 작은 일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별거 아니었던 일들 조차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위대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는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누가 나에게 조금만 부정적인 제스처만 보여도 난 흠칫 나만의 비밀이 들통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 비밀이 드러나면 내 가족들은 무척 걱정할 것이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에 숨기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난 간신히 봄과 여름을 지냈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난 예전에 함께 공동육아를 했던 집에 마실을 갔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게 내버려둔 채, 어른끼리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난 멘탈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낀다며 위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분은 멘탈이 어떻게 약해진 것인지 더 자세히 물었고, 만사에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삶이 힘겹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우울 장애라고. 보통은 "우울증"이라고들 부르는 그것이라고.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되면 정신과 상담을 추천한다고 했다. 본인도 비슷한 문제로 오래 고생했기 때문에 잘 아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무척 많은 것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마술같게도 그 뒤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누가 강하게 부정적으로 나오면 마음이 많이 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겨울엔 그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지금도 조금씩 나아져 가고 있는 중이다. 


내 인생은 언제나 구경꾼에 가까운 입장이었던 것 같다. 기자처럼, 언제나 현장에 있지만, 현장에 함께하지 않고 기록하고 전하는 관찰자와 같이 세상 일을 관찰하고 법칙을 찾아내려 했었던 것 같다. 높은 곳을 무서워 하는 사람도 높은 곳을 무서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듯, 난 삶에 직면하는 것을 무서워하면서 삶에 대해 논해왔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난 요동치는 감정에 내 이성이 주석을 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감정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성은 그것을 정당화했다. 이성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감정이 침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2018년에 발견한 가장 중요한 가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