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의 오류
후배가 한 명 있었다. D군은 잘생기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동아리 선배였던 날 많이 따랐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눈에 띄게 침잠하기 시작했다. 젊었던 시절이었고 종종 그런 때가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걱정하면서도 곧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D군만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그 친구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연락이 끊겼다. D군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했다.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노파심에 덧붙이는데, 이 말을 한 친구는 걱정하며 진심을 담아 한 말이다) 하기도 하고, 마음에 두고 있던 다른 친구와 잘 안되서라고도 했다. 하지만 D군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난 학부를 졸업했고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박사후 연구원으로 연구소들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D군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죄책감이 들었다. 학교를 관둘 정도로 상처입은 동안 난 그정도로 아팠는지 몰랐던 때문이다. 아파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얼마나 아팠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한 사유가 되겠는가. 모든 어그러짐은 "그정도로 아팠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닌가.
약속날, D군이 찾아왔다. 목소리, 외모는 여전했다. 하지만 먼저 이야기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끊긴 사운드를 잇기 위해 끊임없이 내오는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듣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에 내가 가졌던 관심사에 대한 것이었을 텐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D군은 정말 귀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D군은 집에 갔다. 아마도 갔을 것이다.
얼마 후 다시 한 번 방문해도 괜찮냐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다시 대학교 내 카페에서 만났을 때 D군은 중년의 두 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난 면식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의외의 기쁨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만일 50%의 확률로 의외의 기쁨과 의외의 불쾌가 발생한다면 난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D군이 다니는 교회의 무슨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D군은 내게 자신이 무척 존경하는 분이고 그분들의 말씀을 내게 전하고 싶다 했다. D군이 무척 원망스러웠지만 떨치고 자시고 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나였기에 그냥 앉아 있었다.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D군은 이 이후로 헤어질때 인사하는 것만 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뒤의 대화는 전부 나와 그 교회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글은 그 대화 속에서 깨달았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난 대진회라던가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여타 다양한 종교인들과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눈 편이다. 일차적으로 난 그들이 말 걸기에 좋은 타입이다. 말을 무시하지 않고 이유없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수업을 빠졌던 것이 기억난다. 수업 때문에 가려고 한다고 하자 대진회 소속의 그 대학생은 내게 그렇게 물었었다. 수업은 왜 가야 하는 거냐고. 그런데 그 말에 말문이 막혔었다. 왜 수업에 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수업에 가는 이유는 내가 수강신청을 했고, 수업에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수업에 나가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는데, 우주의 몰락을 걱정하는 그 대화에 그런 세속적이고 유치한 이유로 수업을 가야겠다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그때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번 반복되자 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립했고, D군의 교회사람들을 만났을 때에는 이미 그런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길가다 만났다면 피했겠지만 D군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난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야기나 나눠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 그사람들은 원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수만이 죄가 없고 모든 인간들은 죄가 있다고 했다.
나도 안다. 이런 해석이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안하니만 못한 말이라는 것을. 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다른 어떤 이도 나처럼 신앙을 가지게 하고 싶다면, 난 저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그사람들은 이런 얘기로 시작했다.
그 뒤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했는데, 나는 그사람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그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렇게 씌여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부분에서 난 언제나 과학청년의 입장에서 그런 기적의 실현 불가능성, 입증 불가능성, 그리고 비유로서 가지는 가치를 이야기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이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이 글의 핵심은 이 부분이다.
자, 내가 어떤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앞에서 기적을 행해 보였다. 그리고 난 그것이 눈속임이 아님을 확인한 상황이라고 하자. 즉, 내 눈앞에 보였던 저것은 진정으로 기적인게 확실하다. 착각이 아니다. 여기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 사람은 어떤 신념 체계를 믿으라고 권했다. 나는 이 사람이 권한 것을 따라야 할까? 이 사람은 기적을 일으켰으니까 뭔가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기적과 그 사람의 제안은 별개의 것이다. 기적과 제안이 통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난 뒤 그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러저러한 메시지를 믿으라면 그건 다른 얘기다. 하지만 메시지가 매력적이라면 그 메시지를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과 무관하게 메시지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메시지를 그 메신저가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믿었다면, 메신저의 입장에서도 만족스러울까? 내가 알기론 예수도 기적 때문에 사람이 따르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으로 안다. 나는 이 깨달음을 발동시켜준 그 신도들과 D군에게 그런 의미에서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 깨달음으로 인해 그분들의 메시지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권위에 신뢰를 위임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신뢰는 권위의 강도에 비례한다. 그것은 기적의 강도와 같다. 그리고 유능한 약장수가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같다. 그의 매출액은 퍼포먼스의 놀라움에 비례한다. 멋진 퍼포먼스에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약장수는 은근슬쩍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