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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dust 길벗

눈부신 일상을 껴안기 위해 -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이 영화를 되풀이해서 볼 때마다 나는 아득한 슬픔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눈물이 민망할 정도로 흔한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영화 속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지울 수 없는 사진처럼 가슴에 다가와 파문을 일으킨다.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 새 그 사진 속에는 내 지나간 추억과 아픔들이 진한 그리움으로 겹쳐진다. 이 영화는 내게 분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신 관조와 공감의 세계로 나를 부른다. 나도 이제 사진사가 되고 싶다. 자막이 올라간 후에도 잔상으로 남아 나를 끌어들이는 사진들을 사진첩에 정리하고 싶다. 가능하면 토막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텅 빈 운동장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내 곁에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방안에 스며드는 빛이 정원의 잠을 깨운다. 초등학교 운동장과 동네 골목에서 울려나는 소리들.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약간의 소란스러움 속에.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로 가득 찬 초등학교 운동장도 시간이 흐르면 적막함이 감도는 텅 빈 운동장으로 변할 것이다. 활기찬 동작들도, 아우성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버지 곁에서 잠을 청한, 천둥소리가 요란한 밤이 지나고, 비 개인 텅 빈 운동장 광경이 삽입된다. 정원이 찍은 자신의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바뀌었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눈 내리는 학교 운동장의 모습이 보이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사라짐...

 

 

 

덥고 짜증나는 여름, 장마

 

더운 건 이젠 아주 지겨워.

지겨워

 

 

 

 

달리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습관이 되어버리고, 관성이 되어버린 일상. 너무 무덥고 짜증이 난다. 단조롭고 시시해 보인다. 변화가 없다. 어항 속의 붕어처럼 한정된 공간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닐까? 주차 단속원의 제복을 입는 순간 또 다시 덫에 걸리는 것이다. 무더운 날은 계속되고 사람들과의 말다툼, 실랑이도 계속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단지 돈 때문에 마지못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일상은 여름의 무더위와 긴 장마를 닮았다.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사진관에 들어선 다림이 말한다. 더운 건 이젠 아주 지겨워

 

정원과 아이스크림을 먹던 다림이가 어린 시절 형제들과 먹는 것을 두고 전투를 치르던 경험을 이야기하다 한 번 더 말한다. 지겨워“  정원은 무더위에 지쳐있는 다림에게 아이스바를 건네고, 피곤을 감추지 못하고 사진관 의자에서 잠을 자는 그녀에게 선풍기를 돌린다.

 

다림에게는 그토록 지긋지긋한 일상이지만 정원에게는 한 순간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은 일상이다. 정원은 오토바이를 타고 반찬거리를 장만하러 다녀오고,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준비하며 파를 다듬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 영화 전편에 끊임없이 삽입되는 정원의 일상 풍경은 무게를 지닌다. 대청마루에서 발톱을 깎다 눕는 모습까지도. 무더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순간들이 되풀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이라는 추억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마친다."

 

 

 

 

우연히 길에서 첫사랑을 만난다. 서먹하게 몇 마디만을 나누고 헤어진다. 어릴 적 책갈피에 사진을 끼워두고 보았던 첫사랑, 마음을 읽고 싶어서 날씨를 베껴 쓴다는 핑계로 일기를 빌리려고 했던 첫사랑,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지만 아직까지 사진관 한켠에 사진으로 걸려있는 첫사랑.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노름과 폭력에 시달리며 생활하는 첫사랑. 말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가슴이 저며온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끝내 추억으로만 머무는 사랑. 왜 나는 너와 함께일 수 없었나? 이제 그 두근거림은 사라졌지만 가슴은 아직도 저며온다.

 

버스 안 창문 너머로 그 첫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토록 강렬했던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마친다는 생각을 한다.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가 흐른다.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흔들림

 

"사람이 죽어서 귀신 되는 거 아니니? ”

조용히 해? 씨발. 내가 왜 조용히 해.”

 

 

 

 

 

오랜만에 친구가 보고 싶다. 청춘의 고뇌와 추억을 함께 했던 친구. 한 때 가슴 벅차는 고백을 주고받기도 하고 치기어린 행동을 함께 했던 친구와 밤새워 술을 마시고 싶다. 술에 취해 장난스레 고백을 한다. 나 곧 죽는다.” - “ 야 이 새끼 이거 술 처먹을려고 별 수작을 다하네. 그래 임마 먹자. 이새끼야.” 욕설을 주고받으며 어깨동무를 한다. 친구와 몸을 부비고 싶다. 몸을. 어느 날 이 장난스런 고백이 진실이 되는 날 친구는 또 얼마나 서럽게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까?

 

정원은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을 감추고 싶다. 걱정하는 첫사랑 지원에게 소탈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오빠 많이 아프다면서?”- “아냐 야. 나 멀쩡해.” 귀신이 무섭지 않냐는 다림의 질문에 대답한다. 뭐 어떨 땐 무섭다가도 어떨 땐 하나도 안 무서워. 사람이 죽어서 귀신되는거 아니니? 다림이도 그렇구, 나도 그렇구.” 어차피 죽음이란 이미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낯설어서 불안하고 두려운 세계이긴 하지만. 담담하게 조용하게 받아들일 것!

 

동생과 마루에서 수박을 먹는다. 쑥스러운 질문을 받고 엉뚱하게 수박씨를 마당으로 뱉는다. 동생도 따라 한다. 그렇게 마구 수박씨를 뱉다가 함께 웃음을 터트린다. 어느 새 유년 시절로 되돌아갔다. 오빠를 보며 웃던 동생의 표정이 갑자기 울상이 된다. 언제 다시 이 장난을 되풀이 할 수 있을까? 추억은 흘러가고, 그 추억마저도 재현할 수 없게 된다. 동생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그러나, 흔들림을 감춰야 한다.

 

천둥이 치는 밤 천둥 소리에 잠을 깬다.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 밤 나는 다시 천둥이 무서워 아버지를 찾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 곁에 살며시 눕는다. 아버지!

 

무섭다. 서럽다. 그러 흔들림은 감추어야 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운다. 그러나, 울음은 점점 커지기만 한다. 정원의 방문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그러나, 흔들림을 감춰야 한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멀어진다.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흔들림이 서러운 흐느낌이 되기도 하고, 폭발되기도 한다.

파출소에서 난데없이 정원이 소리친다. 조용히 해? 씨발. 내가 왜 조용히 해?” 누가 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가? 침묵은 죽음의 이미지이다. 나는 이토록 살고 싶다. 고함을 쳐서라도 나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싶다. 나는 침묵이 될 수 없다. 욕설로라도 고함으로라도 버티며 이 삶을 지탱하고 싶다.

다 먹었어?” 병원 입원실에서 상을 치우려는 동생을 제지한다. 이를 악물고 남은 밥을 몽땅 국에 말아먹는다. 살고 싶다!

 

 

사진첩

 

나 사진 이쁘게 찍어 줘야 돼...

 아 이거 제삿상에 놓을 사진이야

 

 

 

 

한 가족이 가족 사진을 찍으러 왔다. 할머니, 아들, 손자들... 함께 사진을 찍고, 아들들은 어머니에게 독사진을 찍을 것을 권유한다. 이제 할머니 혼자만 의자에 앉아있다. 아들들은 아무런 말없이 담배만 핀다. 그 할머니가 다시 사진관에 찾아온다. 사진을 예쁘게 다시 찍어달라고. 나 사진 이쁘게 찍어 줘야 돼... 아 이거 제삿상에 놓을 사진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이 거나하게 취해 함께 사진을 찍는다. 가족들과도 함께 사진을 찍는다. 바로 이 시간, 이 사람들과 이곳에서!

사진은 과거일까, 현재일까? 사진은 과거 속의 생생한 현재이다. 그곳에는 사진으로 붙잡아 매어두고 싶은 실존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사진에는 외침이 있고 메아리가 있다. 사진은 외칠 것이다. 나 이 순간 이 곳에 이런 모습으로 존재했음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펼쳐본 사진첩 속에서 그 사진은 메아리를 낳는다. 내가 그 순간 그 곳에 그런 모습으로 존재했음을.

 

이제 홀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처럼나를 멈추고 싶다.

살아 숨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사라지고 사진만이 남는다.

사진만이.

 

 

8월의 크리스마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그러나, 다림을 향한 정원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 미완성 교향곡이 과거형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듯.


Thornton Wilder의 희곡< Our Town>에서 주인공 에밀리는 사후세계에서 놀라운 말을 듣는다. 원하면 자신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다고 한다. 단지 지켜볼 수 있을 뿐이지만.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에밀리를 만류한다. 견딜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될 거라고. 가장 행복했던 날을 선택해 그 순간으로 돌아가겠다는 에밀리는 충고를 듣는다. 가장 시시하고 별 볼일 없었던 날을 택하라고. 그 날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깨닫게 될 거라고.  그녀는 12번 째 생일을 선택하고, 그 삶의 순간들을 지켜보게 된다. 매 순간 순간 가슴이 벅차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너무 무심하게 시간을 보낸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결국 흐느끼며 그녀는 소리친다. “ 삶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순간 삶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나요?” ( Do any human beings ever realize life while they live it? - every, every minute?") 


무덥고 짜증나는, 끝날 것 같지 않은 8월이 계속된다. 모험도 없고 지겹기 만한 일상이. 그러나 그 속에 크리스마스처럼 눈부신 세계, 눈 덮 인 세계가 깃들여 있다. 거짓말처럼. 껴안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