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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앵두

아빠의 사업이 실패하고 빚을 안은 채 도망치듯 밀려왔던 비가 새는 암사동 집에서 유년의 끝자락부터 사춘기 초입까지 살았다. 이 시기 나에게 가난은 부끄러움으로 등치되곤 했다.

이곳에 오기 전, 빚쟁이가 대문을 두드리면 아빠 집에 없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뚝섬 시절의 경제 상황이 더 심각했을테지만 아직 가난의 무게를 알아채기엔 너무 어렸기에 장롱을 들어내고 죽은 쥐를 꺼내기도 했던 공장의 단칸방도 우울의 장소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곳의 내 단짝 친구(한두 해 전 엄마가 집을 나가고 들어온 친구의 새 엄마는 혀를 동그랗게 말아 비눗방울 같은 침방울을 만드는 묘기를 부릴 줄 알았다)와는 스케치북이 아닌 원단 박스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동네 언니 오빠들은 어린 동생들을 다방에 들여보내 껌을 팔게 했는데, 그조차도 재미있는 모험이고 놀이였다. 껌팔이에 성공했을 때의 묘한 흥분과 돌아오는 길에 언니오빠가 사 주었던 50원짜리 초코바의 달콤함이라니.. 내가 아직 어렸던 탓도 있지만 너나 없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것은 결핍일 수 없었다. 오히려 엄마아빠, 삼촌과 공장 숙소에서 함께 살았던 여공 언니들의 사랑까지 받았던 여섯 살은 하루하루가 신나고 충만한 날들이었다. 여공 언니들 앞에서 ‘밤차’노래에 맞춰 손가락을 허공에 콕콕 찌르는 춤을 추며 언니들과 까르르 웃어대던 밤의 흥겨움이 생생하다. 공장이 부도가 나서 팔려나갈 방직 기계 안에서 기름 묻은 쇠구슬을 건지면 세상 진귀한 보물을 찾은 듯했으니, 그 시절의 나에게 가난이란 어렴풋이 느껴졌던 어른들 세계의 비밀에 불과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고 주변과 비교를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는 가난의 냄새를 알아챌 수 있었다. 처음 암사동으로 이사 왔을 때, 물론 내가 살던 셋방이 골목에서 가장 낡은 집이기는 했지만 주변도 고만고만한 단층 주택들이었는데, 80년대 중후반의 서울 변두리 골목은 불과 몇 년 사이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던지라 그곳을 떠나기 전에는 3~4층의 다세대주택 사이에서 얼룩처럼 박혀있었다.
친척의 도움으로 취직하기 전까지 아빠는 몇 걸음이면 가로지를 수 있는 좁은 방에서 뒷짐을 지고 종일 빙빙 걷곤 했는데, 나는 가끔 그 등에 업혀 같이 눈을 감고 원을 느끼기도 했었다. 봉지쌀을 사지 않고 정부미를 포대로 샀다고 안도하는 엄마를 보며 나도 안심이 되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다듬어 버리는 배추 겉잎을 얻어 와서 국을 끓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배춧잎을 얻어오는 할머니가 못마땅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거지도 아니고 남이 버리는 쓰레기를 왜 주워오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상추 밭에 품삯일을, 엄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쌀 떨어지는 걱정을 면하기는 했지만 우리 가족은 내내 가난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심부름으로 라면을 사서 까만 봉지를 달랑거리며 집으로 오는 길에 같은 반 여자아이가 엄마랑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골목 앞에서 마주쳤다. 우리반 반장이었던 그 아이는 반에서 가장 잘 산다고 소문났었다. 초여름, 빨간 앵두를 먹으며 “여기 사니? 집이 어디야?”라고 묻는데 골목 초입에 딱 멈춰서서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지나쳐서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고개만 돌리면 쓰러져가는 우리집, 번듯한 다세대 주택 사이에서 녹슨 파란 대문이 삐걱이는 우리 집이 너무 잘 보였으니까. 나는 차마 집을 가리키지 못하고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돼.”라고 말하고 말았다. 난데없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워서 얼굴이 활활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아이에게 열등감, 시기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학급 반장 선거의 후보자로 선거 전에 정견 발표를 하라고 하면 나는 늘 ‘사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들어왔다. 그 시절 학급 임원이란 엄마들이 학교에 자주 드나들어야 하고 돈을 각출해서 어린이날 선물과 간식 꾸러미를 나누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선생님에게 촌지를 줄 수도, 엄마가 공장을 빠지고 학교에 올 수도, 찬조비를 낼 수도 없이 가난했으니까. 그런 나에게 풍금을 치고, 늘 예쁜 옷을 입는 얼굴 하얀 부잣집 아이가 ‘저를 뽑아주시면~’으로 시작하는 정견 발표를 하고 반장이 되었던 그 상황이 내심 질투가 났을 것이다.

아직도 빨갛게 익은 앵두를 보면 그날의 당혹스러움이 생각난다.
나의 가난이 부끄러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순간 거짓말이 튀어나왔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다시 달아오는 것 같다.
가난의 한복판에서도 행복했던 아이는 가난이 비교되기 시작하면서 부끄러움을 삼키는 아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