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부끄러운 선물
장을 본지 오래되어 건건한 먹을 거리가 없는 냉장고에 배추 반 포기가 반갑다. 얼른 반죽을 하고 배춧잎을 떼어 전을 부쳐 점심 메인 찬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배추전을 먹기 싫어하는 선우에겐 손톱만큼씩 잘라 억지로 몇 조각을 먹게 하는데, 지우는 젓가락으로 죽죽 찢어가며 잘도 먹는다. 오물오물 야무지게 먹는 딸아이 입을 보면서 신기한 마음이 든다. 나는 저 나이 때 배추전 싫어했는데…
배추는 어린 시절 우리 집의 가난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음식이다. 시장에서 버려지는 배추 겉잎을 얻어다 국을 끓여야 했던 지독한 시기를 지나서도 살림은 크게 펴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도 김장은 80~100포기를 했었다. 김치라도 있어야 찬 걱정을 덜고 든든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김장을 독에 묻고 조금 지나면 국물이 배어 나왔는데, 할머니는 같이 상추밭에 삯일을 다니는 진한이 할머니에게 그 김치국물을 퍼서 주시곤 했다. 우리 할머니가 담아주는 김치 국물을 받아가면서 "고맙네" 인사를 하시는 진한이 할머니는 쪽진 백발이 고운분이셨다. 가끔 우리집에서 할머니와 막걸리 한 병을 나누어 드시고 가셨는데, 엄마는 술드시는 할머니들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식구들 먹을 저녁 찬을 안주로 내드렸다. 나는 진한이 할머니에게 김치 국물을 드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하다못해 배추라도 한 포기 얹어 주지도 못하면서 뻘건 국물이 뭐라고 나누고 자시고 하는지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받아가기 싫은데 할머니가 괜한 오지랖으로 자꾸 주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 우리집에 오시던 진한이 할머니가 어느날 이사를 가게되었다며 함께 사는 아들과 함께 귤 한봉지를 들고 인사를 왔다. 두 할머니는 손을 잡고 "건강해라, 그래도 전세로 좋은 집으로 간다니 좋다." 덕담을 하시며 오래오래 아쉬워하셨다. 그제야 나는 너무 보잘 것 없어보여 부끄러웠던 김치 국물이 이분들에게는 어쩌면 고마운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5학년쯤 되었을 때, 우리집은 석간 신문을 구독했는데 가끔은 아저씨가 배달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기껏해야 한두 살 많을 남자애들이 신문이요~ 외치며 대문 밑으로 신문을 넣고 갔었다. 하루는 엄마가 이른 저녁을 하는데 신문 배달하는 남자애를 보고는 배추전을 먹고 가라며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머뭇거리며 엄마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아이를 보고 나는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방안으로 들어가 씩씩거렸다. 맛이 없어서 나도 먹지 않는 배추전을 굳이 저 허름한 부엌에서 먹고 가게 하는지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애가 돌아가자 엄마에게 뭘 맛도 없는 그런 걸 먹으라고 자꾸 권하느냐고 눈을 흘기며 짜증을 냈다. 엄마는 "저렇게 어린애가 돈 벌겠다고 다니는데 이 시간이면 기름냄새 나는 집들 지나면서 얼마나 허기지겠느냐, 너나 배추전 싫어하지 금방 부친 배추전이 얼마나 고수운데.. 쟤도 맛있게 두장 뚝딱 먹고 가더라"며 별걸로 유난이라는 듯 나를 나무랐다. 그나마 맛있게 먹고 갔다니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역시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굳이 먹고 가라고 권하는 엄마가 다 이해되지는 않았다.
어려서는 부끄럽기만 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이런 태도는 어느새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어제 오늘 빌리집을 청소하러 오시는 아주머니가 마음이 쓰였다. 점심식사 시간 전후로 딱 맞춰 청소를 해야 하는데 허기지시겠지. 그렇다고 일하시는 중간에 뭘 드시라 하기도 어렵고, 일당을 드리면서도 왜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평소에도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 걱정을 하는 나를 보고 주면에서 “너나 걱정해, 니가 젤 돈도 없고 불쌍해”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런 나의 마음이 타인에 대한 값싼 연민이나 동정은 아닐 것이다. 친구들의 말처럼 마음 쓰이는 누구보다 내 상황이 낫지는 않으니까.. 그냥 점심도 거르셨는데 힘들겠다는 마음이 드는 걸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다. 타고난 오지라퍼라고 해야 하나.. 돌고래의 애니어그램 해석처럼 2번의 성향이라 그렇다고 해야 하나… 멀건 김칫국물이나 심심한 배추전이라도 나누어주고 싶어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DNA가 내게도 있나 보다.
아무튼 오늘 청소해주신 아주머니에게 마당에서 딴 거라 맛은 크게 없지만 드셔보시라고 대봉시 몇 개랑 귤을 담아 드렸다. 언젠가 지우가 왜 그런 걸 굳이 주느냐고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