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나에게도 어렸을 때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노트북) 컴퓨터와 자전거, 그리고 사진기였다. 세번째인 사진기는 종종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긴 했지만.. 컴퓨터와 자전거는 지금까지 항상 한 번도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 지금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어렸을 때에는 이 세가지는 하나하나 가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트북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잡지에서만 볼 수 있는 전설의 물건 같은 것이었고, 사진기는 어른만 만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없었기 때문에 나 또한 가지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으되 없다는 이유로 슬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는 달랐다.
내가 한국 나이로 7세였을 때 내 동생은 5세였고 어머니는 동네에서 작은 약국을 하고 있었다. 약국 앞에는 122번 (현 서울 650)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이 122번 버스에 동생이 치여서 며칠간 혼수상태에 있었을 정도로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이로 인해 교통수단에 트라우마가 생겨 나는 내가 사는 블럭에서 버스가 다니는 급의 길을 건너야 할 때 어머니께 반드시 신고를 해야 했다. 어렸을 때에는 큰길인데도 육교나 신호등이 없는 경우가 흔했으므로 그런 경로가 있는 친구의 집에는 갈 수 없었다. 이런 어머니였기에 당신께서는 아들에게 절대로 자전거를 사주지 않으셨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순간을 기억할 것 같다. 나 역시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난 어떤 골목에서 어떤 자전거로, 어느집 대문간을 발판삼아 탔는지 그날 날씨가 흐렸다는 것까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나에게 자전거는 너무나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내 자전거를 소유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 아주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난 옆집 아이의 자전거를 빌려탔다.. 라고는 하지만 하루종일 거의 매일을 빌려 탔으므로 그건 거의 반쯤은 강탈이나 다름 없었다. 내 또래 아이가 4명이나 있는 그 이웃집에서는 싫어할법도한데, 적어도 나에게는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 돌이켜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우리집이 주인집이고 그 이웃집이 세입자여서 그랬을 가능성이 무척 높았을 것 같다. 그땐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여하튼 그집 자전거는 그당시 시세로도 무척 낮은 가격에 (내 기억이 맞다면 새우깡 15봉지 값이었던 1500원에) 구매한 중고 자전거였는데, 한참 타다보면 체인이 빠지곤 했다. 그것도 익숙해져 난 나뭇가지로 체인을 제자리에 점점 더 재빨리 걸게 되었다. 그리고는 계속 그것을 타고 다녔다.
보다못한 어머니께서 자전거를 사주시기로 결정했던 날, 난 이웃집 아저씨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근처 자전거 가게로 갔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저씨가 자전거 사는데 따라가준것도 지금은 이해가 된다.. 딸들 타라고 사주신건데 옆집 아들네미가 타고 다니니 얼마나 속터지셨을까.. 여하튼 난 25000원짜리 중고 자전거를 샀고, 난 그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될 때까지 타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자전거의 최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도둑맞았던가.. 아니면 고장났던가.. 오히려 기억에는 옆집의 빌려탄 체인 잘빠지던 그 자전거가 더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펑크나서 1000원이었나 2000원이었나를 주고 땜질했던 기억도 숟하게 있고, 두손놓고 탄답시고 두손 놓고 타다가 한쪽팔을 아스팔트에 쓸어서 피투성이가 되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걸어가기엔 다소 부담되는 친구네도 이제는 한달음에 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아이, 바구니도 달려있어서 작은 짐도 싣고 다닐 수 있었던 그 내 유년시절의 자전거를 나는 지금도 너무나 좋아한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전거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게 되었다. 아마도 중학교때 엘레베이터가 없는 주상복합건물의 끝층에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둘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입시 압력에 압도되어 자전거는 내 스스로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기도 했었고.
대학에 가서도 집과 대학은 너무나 멀었다. 한번인가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집까지 타고 갔던 적이 었었으나 너무나 힘들어 관뒀다. 당시에는 자전거도로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전거에 대한 열망은 연애시절에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 연애하던 시절 나도 알고 애인도 알고 있던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신림동에서 서울숲까지 온 적이 있었다. 저 거리가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는 데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자기 자전거를 한 번 타보라고 했었을 때의 일이었다. 자전거가 자전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탔으나, 그 자전거는 너무나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날밤 나는 그 친구의 자전거를 타는 꿈을 한 번 더 꾸었다. 너무나 부드러워 앞으로 밟으면 앞으로 가고, 뒤로 밟으면 뒤로 가는 꿈이었다. 그다음부터 자전거를 사고 싶은 열망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위의 저 친구가 자신이 새로 사고 난 뒤 남은 원래 자전거를 나에게 주었다. 프레임을 달마시안 얼룩 무늬로 직접 칠했던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를 타고 난 동네 전철역까지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회사를 관두고 다른 전공의 입시를 준비하던 애인도 바구니 달린 귀여운 자전거를 하나 구해서 같이 도서관을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당시 나는 석사를 거의 마치고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가서 오스트리아에서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신혼여행은 자전거와 함께 했다. 그리고 낑낑대며 간신히 비행기에 자전거를 싣고 집으로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대략 5만 km 정도를 자전거로 달린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엑셀에 수동 기록한 것이 2010년까지 15000km, 스마트폰으로 기록한 것이 33000km 정도 된다. 그 자전거에는 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매 자전거에는 냥을, 그리고 그 뒤에 구매한 노란 중고 자전거에는 달빛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산에 이사온 것이 2014년 여름이다. 관성이 있었는지 2015년에는 그래도 서울 일산을 뻔질나게 다니긴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자전거 기록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2019년 올해는 200km도 제대로 타지 못했다. 몸무게는 계속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고, 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놀라게 할 만큼 나왔다.
그래도 난 지금도 자전거가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타고 나면 기분이 좋다. 타기 전에는 설레인다. 다행히 아이들도 자전거를 좋아한다. 특히 이연이가 많이 좋아한다. 등산을 할 때마다 산악자전거를 보면 너무나 관심있어하고, 자기 자전거를 가지고 산에 가겠다고 종종 떼를 쓴다. 난 산악 자전거는 타지 않았지만 이연이가 보조바퀴를 떼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면 도전할 생각이다. 우연이와는 탱고를, 이연이와는 산악자전거로 클라이밍을 하는 것이 내 소원중의 하나다. 욕심을 좀 더 부리자면 여자친구와 탠덤 자전거를 타고 긴 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