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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dust 길벗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통해 본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

부조리의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시킨다.”

-카뮈

길 없는 시대에 길 찾기

주어진 길을 따라 거닐면서 부딪히게 되는 고통과 미로 속을 헤매며 부딪히게 되는 고통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길을 인도해줄 별이나 나침반이 있다면 고난 속에서도 순례자를 버티게 해줄 위안과 희망이 있다. 그러나, 뚜렷하게 제시된 길 없이 고독하게 온몸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이에겐 피비린내 나는 좌절과 고통만이 있을 따름이다. 희망이 아닌 절망, 위안이 아닌 불안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번번이 벽에 부딪히는 인간! 이는 바로 카뮈가 그려낸 현대인의 초상화다. 카뮈는 참혹한 어둠과 광기의 시대를 살았다. 밝게 웃음 지으며 당당하게 전선을 향했던 젊은이들이 포성이 난무하는 참호 속에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던 시기, 히틀러라는 초인의 광휘 아래 기름과 연기로 사라진 수없이 많은 유태인들의 고난의 절규가 들리던 시기, 혁명이 정의와 자유에서 떠나 또 다른 폭력으로 바뀌었던 시기를. 인간이 신의 진리에 반기를 들기 전 고달픈 삶일망정 인간에겐 희망이 있었고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다. 신의 말씀을 나침반 삼아 신께서 이끄시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현실의 고통은 미래의 희망에 의해 치유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 인간은 또다시 신에게로 돌아가야 하는가? 카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한다. 카뮈는 세계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다고 선언한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는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고 신의 섭리 안에 있지도 않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모든 갈망과 노력은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세계와의 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 인식과 상황이 바로 부조리이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의미와 희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모순과 허망의 상황 속에서 가치 없는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살인가? 아무것도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 않기에 살인마저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다.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는 인간에게도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조리는 단지 인간과 세계를 엮는 관계 속에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자살도 살인도 부조리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하고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카뮈는 절대적 허무주의와 도피를 거부한다. 그는 부조리의 사상에 대한 응답으로서 반항의 사상을 제시한다. 부조리에 대한 응전 그것은 바로 반항이다. 시지프 신화이방인에서 제기된 부조리의 사상은 반항인페스트에서 반항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길 없는 시대에 길을 찾으려는 허망한 노력! 카뮈의 관심은 이제 여정의 끝에 이르게 될 환희의 목적지에 있지 않고 길을 찾아 헤매는 처절한 방황 자체에 있다.

 

도피냐 반항이냐?

카뮈는 그의 작품 페스트에서 페스트의 만연으로 외부세계와 차단된 오랑시의 처절한 상황과 그 속에서 페스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여러 인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출구가 차단된 갇힌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강요되고, 죽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혼돈과 절망의 도시 오랑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활동과 사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카뮈는 이를 통해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페스트로 상징되는 억압과 허망의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도피하고 어떤 이들은 반항한다.

파늘루 신부가 신의 섭리로 도피한다면 랑베르는 오랑시의 탈출을 통한 개인적 행복과 사랑을 모색하며 눈앞의 처절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한다. 범죄자 코타르는 오히려 페스트와 공고히 결합함으로 안정과 희망을 얻는다. 이에 반해 리외, 타루, 그랑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처절한 현실의 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고통스러운 투쟁을 벌여나가는 반항을 선택한다.

파늘루 신부의 페스트에 대한 대응은 인간의 삶을 신의 섭리라는 거대하고 믿음직스러운 품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다. 페스트 발생 초기에 파늘루 신부는 갑자기 닥친 오랑시의 재난은 신을 떠난 거만한 인간들을 다시 신의 품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신의 섭리라고 단호히 선포한다. 신의 재난은 오만하고 눈먼 인간들을 그 발아래에 무릎 꿇게 하기 위함이니 오히려 재난을 통해 신의 진리와 영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신부는 설교한다. 재난조차도 신의 인간을 향한 자비의 차원에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단호하고 신념에 차 있던 파늘루 신부조차도 보건대 활동을 통해 맞부딪힌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고뇌하게 된다. 죄 없는 어린아이가 거친 호흡과 비명, 발버둥 속에서 서늘히 식어가는 것을 보고 동요한다. 의사 리외는 어린애들까지도 주리를 트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부에게 항변한다. 의사 리외의 항변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 이반 카라마조프의 고뇌에 찬 항변을 떠올리게 한다. 이반은 가상의 피안의 세계에서 주어질 축복과 조화의 약속이 무수한 세대에 걸친 인간의 죄와 오욕과 고통을 밑거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거부한다고 말한다. “ 만일 어린애들의 고뇌가 진리의 보상에 필요한 만큼 꼭 필요하다고 한다면, 나는 미리 단언해 두겠어. 모든 진리는 그만한 가치는 없다고.” 이반은 지상에서 인간의 역사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도 조화될 수 없는 깊은 모순에 빠져 있다고 말함으로써 신의 질서를 거부하고 반역을 꾀하는 것이다. 모순에 가득 찬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파늘루는 페스트에 대한 신앙적 해석에 변화를 보인다. 인간의 죄와 신의 징계라는 소박한 해석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까지도 맹목적인, 신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으로 변화한다. 단호했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신중하게 변하고, ‘여러분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혼돈과 모순에 찬 삶의 현실에 직접 부딪힘으로 파늘루는 예언자적 단호함이 아닌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고뇌와 동요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늘루는 현실에 치열하게 반항하기보다는 신의 품에 안기는 쪽을 택한다.

외부에서 취재를 위해 오랑에 들렸다가 갇히게 된 랑베르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부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사랑, 자신은 오랑과 관계없는 인물이라는 인식은 랑베르로 하여금 페스트로 신음하는 오랑의 현실과 거리를 갖게 하고 방관자가 되게 한다. 랑베르는 페스트와 맞서 희망 없는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르외를 추상과 관념을 위해 죽음까지 맞서는 무모한 영웅들이라고 평가하며 무의미한 싸움과 관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라고 충고한다.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것은 지긋지긋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몇 차례에 걸친 탈출 시도가 좌절된 후 드디어 탈출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 날 랑베르는 탈출을 포기한다. 페스트와 맞서기보다는 도피를 통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던 랑베르는 자신 또한 오랑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싫건 좋건 간에 이 고장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전체에게 관계되는 것이지요.” 랑베르는 페스트가 어느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헤쳐나가야 할 현실이며 그러한 상황에서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을 얻고 도피가 아닌 반항의 대열에 참여한다.

페스트에 대한 특이한 대응을 보여주는 인물로는 코타르가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던중 자살을 시도하다 그랑에 의해 살아난 코타르는 기묘하게도 페스트의 만연으로 인해 오히려 휴식과 평화를 얻게 된다. 페스트라는 집단비극에 묻혀 자신의 고통과 상처가 가려지고, 모든 이가 함께 고통받는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느끼는 코타르는 밀매라는 생존 양식을 통해 오히려 페스트와의 강고한 결합을 보여준다. 개인적 불안과 공포가 집단적 불안과 공포로 확대되자 코타르는 고독과 소외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오랑이 감금 상태에서 해방된 후 코타르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총격전 끝에 붙잡힌다. 페스트라는 집단비극 속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는 코타르의 모습은 페스트와의 치열한 대결이 아닌 화합을 택한 또 다른 모습의 도피라고 볼 수 있다.

도피를 선택하는 인물들이 각기 개별적 양상을 보이고 결국 고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 반해 반항을 선택하는 인물들은 강고한 공감과 연대를 보이며 두터운 현실의 벽과 맞서 지난한 싸움을 벌인다. 개인적 차원의 부조리가 집단적 차원의 반항으로 확대된다고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말한다.

 

부조리의 경험에 있어, 고통이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고통은 집단적인 것이라는 의식을 띠게 되고, 또 그것은 만인의 모험이 된다. 이방감에 사로잡힌 인간의 최초의 진보는 그러므로 이 이방감을 만인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인간 존재가 총체적으로 볼 때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 거리감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 오직 한 사람을 괴롭혔던 질병이 집단적 페스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시련 가운데, 반항은 사고의 순서에 있어 코기토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반항은 최초의 명증이다. 그리고 이 명증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만인에 근거하여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의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반항하는 인간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거나, 고개를 떨구고 체념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투쟁한다. 이론이나 명분에 집착하고 얽매이기보다는 인간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 소설의 화자인 의사 리외는 페스트 한복판에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건 회의에 소집된 대부분의 시 관리와 의사들이 페스트냐 아니냐고 하는 추상에 얽매여 책임을 회피할 때 리외는 여러분이 그것을 페스트라고 부르건 전염성 열병이라고 부르건 그런 것은 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반 수가 죽는 것을 막아내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중요시한다. 타루와의 대화에서 리외는 병이 가져오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페스트에 대해서 체념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거나 눈먼 사람이거나 비겁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페스트와의 싸움이 아무리 버겁고 무익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 싸우는 길밖에는 없다는 인식이다. 그 무렵 수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소용없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닐 때에도 리외의 결론은 항상 뻔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었다.” 반항인은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하는 것이다.”(반항인에서) 리외는 자신의 행동을 영웅적인 연극이라고 비판하는 랑베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리외는 영웅주의나 덕성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고 패배자들에게 연대 책임을 느끼고 투쟁하는 것이다.

리외가 페스트의 한복판에서 성실성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투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루도 페스트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결국 그 복판에서 자기 자신이 페스트로 죽음을 맞는다. 타루는 자신이 오랑과 페스트를 알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리외에게 고백한다. 리외가 가난을 통해 반항 의식을 배웠다면 타루는 순조롭고 안정이 보장된 현실의 안락을 거부함으로 반항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타루는 사형 선고 앞에서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죄수의 모습과 그를 피고라는 편리한 개념을 통해 단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사회가 얼마나 비열한 살인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를 몸서리치는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보장하는 생명의 문화가 아닌 억압과 죽음의 문화와 대항해서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나는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뿐이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 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그는 자기 자신조차도 간접적인 살인자축에 끼어들었다는 강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이 선과 정의의 명분 아래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인간의 죽음에 동의했음을 깨닫고 그는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하고 페스트와의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 그는 죽이는 것을 단념한 순간부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추방당한 이방인임을 느끼고 신 없는 세계에서 성인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는 페스트가 집단적 비극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페스트를 통해서 다른 이들과 함께 페스트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누구도 그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타루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걸어갈 길은 연대의식과 공감이라고 믿고 살인을 정당화하는 모든 현실에 반항하는 인물인 것이다.

또 한 명의 흥미를 끄는 반항인은 그랑이다. 그는 리외가 가진 의사로서의 강한 책임의식이나 타루의 치열한 철학적 반성 위에서 페스트와 투쟁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페스트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조용한 미덕의 대표자이다. 감사의 뜻을 표하는 리외에게 그는 가장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하죠. 이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 만사가 이처럼 단순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현실에 반항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도전을 통해서도 반항을 꾀한다. 번번이 자신에게 고뇌만을 안겨주는 완벽한 소설을 쓰기 위해 그는 소설의 첫 문장을 끝없이 다듬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미 완벽한 소설을 완성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 쓰라린 과정에서 그는 힘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리외는 그랑을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약간의 고운 마음씨와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없는 영웅이라고 평가한다.

 

시지프의 미소

신에 대한 반역을 감행한 시지프에게 신들은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에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부과했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끌어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무익하고도 희망이 없는 노동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는 그처럼 부조리한 현실에 체념하지 않고 또다시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내려간다. 시지프는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고전적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과 자체보다는 끝없이 돌을 굴려 올리는 과정 자체에 그의 의미와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다시 돌을 굴리기 위해 산에서 내려가는 시지프가 순간순간마다 자기 운명에 이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바위보다도 더 굳세다고 말한다. 작품 페스트에서 르외, 타루, 그랑으로 대표되는 반항인들의 모습은 부조리의 영웅 시지프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페스트를 향한 그들의 싸움이 결국 패배하리라는 것을 안다. 페스트로 상징되는 억압과 공포, 폭력과 살인행위는 절대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리외는 독백한다. “페스트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수십 년간 가구나 내복 속에서 잠자다가 다시 쥐들을 쑤석대고, 어떤 행복한 도시를 겨냥하는 날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라고. 타루는 르외의 승리가 언제나 일시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르외는 끊임없는 패배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페스트도 계속되지만, 그 페스트를 향한 싸움 또한 계속되는 것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간의 반항에서 우리는 시지프의 미소를 발견한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놓아둔다! 사람은 항상 자기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 준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앞으로는 주인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 무위무익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돌멩이 하나하나, 밤이 깊은 이 산에 있는 금속적인 광휘 하나하나가 오직 그에 대해서는 한 개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하는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시지프의 신화
』에서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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