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서 만난 그녀

 

 

논산. 태어나 처음 와 본다. 사진을 취미 삼거나 뜻을 둔 8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다.  단 두 시간, 논산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는 게 우리의 미션.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들에게 직접 나의 사진을 크리틱 받을 수 있는 기회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원했고 나름 높은 경쟁을 뚫고 합류했다.  당연히 긴장과 기대가 양 어깨를 누른다.

 

난 사진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2년 전 그때처럼 재래시장 주변을 누비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을 사진의 소재로 삼는다는 건 미안한 일 이라서 그들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찍고픈 마음은 경계하기로 한다. 찍는 이의 마음과 찍힌 이의 마음은 같아야 하므로. 사진은 최후로 두고 관계 맺음을 최선에 두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큰 카메라를 둘러메고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행인을 쏘아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 머쓱해져 슬금슬금 돌아 호박이며 가지며 색색의 야채들을 찍거나, 기우는 폐가의 창문을 노출을 바꿔가며 찍어볼 뿐. 손님이라곤 그림자도 안 뵈는 가게마다 그저 드러누워 자리를 지키는 어르신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일이 쉽지 않다. 더구나 '사진'이란 목적을 가진 이상 양심과 충돌하는 것 같아 입을 떼기가 어렵다.

 

걷고 또 걷고 시장길을 헤매다 들어선 어둑한 골목 초입에 가녀린 할머니가 오도카니 앉았다. 이 더운 여름 날 한쪽 팔의 깁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연유가 궁금했지만 날 바라보는 시선이 사납게 느껴져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새 길로 들어선 줄 알고 걷는데 다시 그 자리. 표정 잃은 할머니가 그 모습 그대로 눈동자만을 내게 못 받고 앉았다.

 

"말 좀 물읍시다. 어디서 왔수."

 

백발에 굽은 허리, 기력이라곤 눈동자와 입가뿐인. 더운 날씨이긴 하지만 그늘 진 골목길에 앉았는데도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모르긴 해도 야윈 몸의 다친 팔이 짜증스런 더위를 더할 것이다. 장사는 안 된 지 오래돼 가게 불은 아예 끈채로 하루를 버티는데 웬일로 젊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이 눈에 띄어 궁금하셨나보다. 먼저 말 걸어준 할머니가 고맙다. 곁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옆에 나란히 앉았다.

 

천천히 사는 얘기를 나누다보니 우린 엄마로 또 아내로, 며느리로 여성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당연히 나눌 얘기의 주제들이 넘쳐 난다. 이 땅에서 여자의 길을 먼저 걸은 인생 선배는 얼른 돈 벌어 집 사라는 깨알 같은 조언을 건네고, 까마득한 후배는 마흔이 훌쩍 넘은 다섯째 아들이 아직 장가를 못갔다는 얘기에 함께 걱정하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모르는 당신의 얘길 조금 엿들었을 뿐인데 편안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서로 말만 섞어도 마음이 나눠지는 게 참 마법 같구나 싶기도 하고 삶이 저물 무렵의 얼굴에선 가식의 웃음기가 흩어져 엷은 표피만 남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마음 바닥의 기운까지 모조리 투영돼 이뤄지는 노년의 얼굴. 문득 내 얼굴을 어떨지 궁금해진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같이 생겨가지고. 고마워이."

 

아마 할머니도 벗이 필요했겠지. 그 뜻도 모르고 경계의 눈초리로 오해한 게 되레 죄송하다. 가까이서 보게 된 할머니의 손. 그 끝에 아슬아슬 걸린 붉은 매니큐어. 오래돼 낡고 긁혀 벗겨진 모습이 쓸쓸히 저무는 인생까진 아니래도 쇠락한 이 재래시장의 풍경과는 닮아 보였다. 할머니의 아픈 팔이 나아질 가을 초입 쯤에는 산뜻한 색의 메니큐어가 손톱 한가득 덧칠될 수 있길. 선선한 바람이 휘이 불어와 단단히 굳기를.

 

 

2012. 오래된 글.